august의 군사 세계시두고지에서 재현된 격전 아래 다시 적을 좌절시켰고, 지난 백마고지 전투 때도 중국군은 화살머리고지를 공략했으나 미 2사단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의 분전에 막혀 점령에 실패했습니다. 그때는 주공이 백마고지를 공략하는 동안 그저 조공을 이곳에 투입한 형태였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백마고지가 목표였지만 먼저 화살머리고지를 점령하고 나서였습니다.
[아군의 분전으로 1952년 전투 당시 화살머리고지를 사수했습니다]
중공군은 장마가 끝난 뒤 작전을 실행하기로 하고 23군 예하 73사단(서쪽 사단급 편제)을 몰래 배치했습니다. 당시 이 일대 전선은 1952년 12월 29일자로 미 3사단을 대신해 진지를 인수한 2사단이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양쪽이 교체된 상태에서 백마고지 부근은 다시 혈전이 생길 운명이었습니다.
[ 중공군도 전훈을 교훈 삼아 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1953년 6월 29일, 평소처럼 아군의 화력 지원이 제한되는 심야에 중국군의 선제 포격이 개시되었습니다. 기습을 받아 아군 전초가 무너진 틈을 타 대규모 중공군이 화살머리고지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포착됐습니다. 이곳을 담당하던 제32연대의 방어선이 개통되면서 그날 아침 중공군은 고지를 쉽게 점령했습니다.
[심야에 기습한 중공군이 고지를 점령했습니다]하지만 지금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화녕장 전투에서 대승을 이끌었고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여했던 전통의 17연대가 즉각 반격에 나서 다음날 고지를 탈환했습니다.(관련 글 참조) 어느새 산뜻 경험한 국군은 한 번 밀렸다고 좌절하거나 전의를 상실하는 허약한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중공군도 이곳에서 물러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2사단은 즉시 고지를 탈환했습니다]첫 공격에서 아군의 능력을 확인한 중공군은 일주일 뒤인 7월 6일 다시 공격을 감행했지만 진지의 피탈과 탈환이 반복되면서 전투는 격렬하게 변해갔습니다. 규모가 작았을 뿐 틀림없이 백마고지 전투의 재방송이었고 양상도 비슷했습니다. 갈수록 양측의 피해는 커지고 누구의 인내심이 더 강한지에 결판이 나는 상황이었습니다. ( 관련글참조 )[점점 고지대 일대는 피로 물들어갔습니다]결국 화력으로 적의 증원을 차단함과 동시에 제때 예비대를 투입한 우도부대가 5일간의 격전 끝에 중공군 73개사를 격퇴했습니다. 이 전투가 흥미로운 것은 중공군이 향후 백마고지를 재공격할 때 아군 증원을 차단할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화살머리고지를 공격한 것인데, 정작 이번에도 아군의 예비대 투입을 막지 못한 것이었습니다.[또다시 망신을 당한 중공군은 반격을 시도했지만 휴전이 되었습니다]2사단은 18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중공군 1300여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성난 중공군은 전의를 가다듬고 즉시 다시 공격에 나설 생각이었습니다. 지금은 백마고지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였지만 그해 폭염이 시작된 7월 27일 마침내 휴전이 이루어지면서 공산군의 기도는 완전히 좌절되었습니다.[노도부대는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지난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를 재현했습니다]규모는 작지만 휴전 직전에 벌어진 ‘시두고지 전투’는 백마고지 전투와 흡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중공군은 지난 백마고지 전투의 뼈아픈 경험에도 불구하고 정작 같은 방식으로 대응한 아군의 분투를 막지 못하고 다시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렇게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일, 어쩌면 그게 전쟁입니다. [august 의 군사세계]